윤치호의 협력일기
2010. 3. 28. 22:18ㆍ독서노트/인문, 사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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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지향, "윤치호의 협력일기", 이숲, 2010.
음...
계속 읽으면서 알듯 모를듯한 선을 계속 넘나드는 느낌이랄까?
뭐 국내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저자의 글 자체는 깔끔하고 알기쉬워서 본좌같은 오덕 나부랭이가
딱히 뭐라 할만한 입장은아니고..
찬찬히 읽고, 꼼꼼히 씹으면 좋겠으나 원래 과체중인 본좌는 급히 먹고 급히 내질르는 스타일이니
걍 내맘대로 가겠다.
1. 동네 오덕인 내가 저자-글의 대상만 보고도 "아..어떤 식으로 흐르겠다라는 걸 알정도면 쫌 그렇지 않나?"
김*섭도 들고나왔던 쇼비니즘 이야기에 약간의 탈근대적-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전개...
저항-협력이라는 양 극단에 서로 다른 접점과 회로가 맞닿아 있을거라는 주장 공감한다.
그러나 거기까지
솔직히 읽으면서 느낀건데 그걸통해서 저자가 현재에 무었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지가 감이 안온다.
세상에 절대적 '중립'이란 존재할 수 없다.
맞다. 후세의 판단에 정치적-아니 표현이 애매하니, 그 당시의 입장이란 것이 반영될 수 있는거 지당하다.
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역사적 판단에 대해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.
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러한 각각의 입장이 얼마나 시대의 상식-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지에 대한
성찰과 검증아닐까?
2. 본인이 원하지 않은 민족의 지도자라는 '굴레'를 들이대며 한 자연인의 행동에 윤리적 판단을 가하는 것은
너무 후세의 자의적 행동아니냐고?
공적 영역에서 평가가 가능한 대상이냐는 판정...뭐 애매할 수도 있지만
그가 조선사회에서 가지고 있었던 지위, 그리고 영향력*1으로 보건데 그의 행동은 공적 영역이라는 잣대에서
판단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.
3. 뭐 그렇다고 그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그랬다던가 운운하는 식의 비판을 할 생각도 없지만...
그래도 그가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었던 사회진화론적 사상*2이나 자신의 안위*3는 챙기면서
동포 청년들은 전쟁으로 밀어넣었던(세상사에 그렇게 밝았던 그가 이들이 어떤 운명에 처할지 모르진 않았을꺼 아닌가)
짜증나는 이중 행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할 여지는 있으리라 생각한다.
*1 그는 절대 인민 '대다수'에 속할만한 사람이 아니다. 구한말 일,중 특히 당시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올 정도
(1930년엔 명예법학박사 학위도 받았다!)의 지식인이자 근대 한국 기독교, 교육계의 거물이었다.
정치적으로도 일찌기 독립협회를 거쳐 식민지 말기에는 칙선 귀족원 의원을 맡을 정도에(그 전에는 중추원 참의직
제안을 거절한 적도 있음) 조선총독과 면담을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다.
윤치호에 대한 주요 연표관련하여서는 김상태 편역, "윤치호일기 1916-1943", 역사비평사, 2001. pp. 641-656 참조.
*2 원래 내가 윤치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도 실은 그가 식민지시기 사회진화론적 지식인 중에 대표적인
위치의 사람이여서였다.
관련 주제로는 윤건차, 이지원 역, " 한일 근대사상의 교착", 문화과학사, 2003. pp. 223-280.
박노자, "우승열패의 신화", 한겨레 신문사, 2005. pp. 240-265, pp. 356-404.
두책 모두 그의 '우승열패'적인 세계관 그리고 인종관이 말년 그의 '친일'행적을 이해하는 큰 요인으로서 보고 있다는
공통점이 있다.
아울러 위에 얘기한 "윤치호일기" 편역자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그의 표변 원인을 지적하고 있고...
(여기에 대해서는 김상태 편역, 위의 책. pp. 43-48. 참조)
*3 여기에 대해서는 저자도 설명하고 있는 바이고.. 박지향, 위의 책. pp. 168-176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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